CHAPTER 3. 기아스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 볼 때, 심연 또한 그대를 들여다 볼지니."
2.25
✺ 이상하리만치 고요하다가도,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멀리 들린다..
✺ 온 몸의 세포가 모두 파괴되었다가, 재생되기를 반복한다.
고통에 찬 이들의 신음소리가 곳곳에서 울려퍼진다.
물론, 나의 상태 또한 …
누군가 쏟아놓은 피가 정원 구석에 보인다.
이 피의 주인은 어디로 간 걸까.
무슨 생각을 하며 이 구석까지 들어왔던 걸까.
온 몸이 뜨겁다. 불덩이 속에 들어앉아 있는 느낌이 이러할까?
숨이 턱턱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 같더니,
실제로 숨을 쉴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듯 하다. 찢어질 것만 같아.
눈을 뜨면 사지 중 하나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닐까 … ?
시종들은 모두 더없이 죄송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면서도, 꼭 무언가 기대하는 듯이. 우리를 본다.
“진통제라도 줘...”
”죄송하지만, 이번 열병은 진통제가 듣지 않습니다.”
”드래곤의 관련 권능은?”
”그 또한 효과가 없다 합니다.”
수없이 들은 말인 듯, 매달리는 사람의 앞에 선 시종이 차분하게 대답해 온다.
소환자들의 숙소에 비해, 드래곤들의 숙소는 소란이 낮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과, 절대 죽지는 않는다는 것이
같은 아픔 속에서도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 낸다.
얇고 예리한 칼날로 온 몸이 갉아지는 느낌이다.
눈을 깜빡일 때 안구조차 욱신거린다.
생리적인 눈물이 줄줄 흐를 수밖에 없다.
어떻게 줄어들지도 않는 고통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부수고싶은 충동이 든다.
분주히 숙소를 드나드는 시종들의 품에는 사용한 천이 가득이다.
누군가의 혈흔, 토사물, 배설물까지…
그들은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몸을 움직이고 있다.
그야 그럴테지..
먹은 것도 모두 토해내 이제 나올 것도 없는데, 계속해서 헛구역질이 올라온다.
폐부가 찌부러드는 느낌과 동시에 눈물이 주르륵 나온다.
고통은 파도처럼 밀려 오다가 어느 순간 씻은 듯이 사라진다.
그리고 잠시 후 몰려오기를 반복한다.
길게는 몇 시간 단위로 끊이지 않고, 괜찮은 상태일 때는 잠시 산책도 할 수 있다.
「드래곤」
여행 중도 아닌데, 이러한 고통을 인간의 형체로 겪는다니.
특별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가만히 누워 있으면, 생각지 못한 상념들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가령, 오래 전의…
“본체로 돌아가면 고통이 조금은 덜해질까.”
누군가 심드렁히 읊는 소리에 시종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다.
자신을 다스리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고통에 큰 일을 저지를 지도 모르겠다.
어떤 드래곤이 작은 기둥을 하나 부수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한 번 터진 코피가 두 시간째 멈추지 않고 있다.
이런 거로 죽지는 않겠지만.. 입고 있던 옷이 모두 흥건히 젖을 만큼 피범벅이다.
참을 수 없는 두통에 머리를 짚었다가 털이 한웅큼 빠져나왔다.
본체의 모습이었다면 비늘이 떨어져나갔을 것이다.
무언가 살아있는 것을 송곳니로 물고 뚫지 않는다면 미쳐버릴 것만 같다.
대신 깨문 입 안의 살은 이미 너덜너덜하다.
손으로 가슴 뚫어 뜨거운 무언가를 직접 꺼내고싶다.
그러면 전부 해결될 것 같다.
성장통의 아픔이라고? 누가 그런 말을..
차라리 성장통이 나을 것이다.
이 고통을 작은 존재들도 겪는다니, 심장을 사용하기 전에 미쳐버리는 거 아닐까.
아픔이 끊이지 않는 상태로 의식이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반복한다.
이대로 무언가를 놓으면 그대로 미친 용이 되는 거겠지.
성장통으로는 <완전한 존재>가 되었는데,
비슷한 이것으로는 처음으로 <불완전한 존재>가 된다니.
우스운 일이다.
고통으로 권능의 조절을 못 하게 되면 어쩌나 싶었는데.
권능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무방비한 상태가 될 뿐이다.
텅 빈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자신의 한 쪽 팔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 동족이 보인다.
짐승이 뜯어먹은 것과 흡사한데.. 아니, 표현 그대로일지도.
바로 앞에서 말하는 목소리가 물 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먹먹하게 들린다.
턱이 떨려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아 더듬을 수 밖에 없다.
차라리 동맹을 수락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빌어먹을 약속의 종족.
우리를 창조하고 굽어 살피는 찬란한 솔루스여.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엿이나 먹으라지.
「소환자」
“화장실 변기도 없는 데서 토하려니 기분이 좀 그렇네요”
누군가 말을 붙여온다.
그게 중요한 거야…?
누군가 말한다.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아요.”
왤까? 익숙해 져서? 모든 걸 포기해서?
손해라 생각되니까? 아니면 -...
“죽기 전에 하고 싶었던 것 없어요?”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린다.
왜 죽음을 준비하는 것 같은 말을 하는 거야.
인간의 몸이 70%는 수분이라는 말이 이래서일까?
온 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고 있다…
“의사 선생을 불러오라니까!” 누군가 난동을 부린다.
몸에 저렇게나 힘이 남아 있다니 … 건강한 사람이네 …
때때로 우리들의 세계에 두고 온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이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무어라 할까 …
“왜 우리가 이렇게까지 고통받아야 해?”
뒤따라 오는 울음소리.
기분이 묘해진다.
내 몸을 마음대로 가눌 수 없는 경험은 드문 일이다.
우리는 정말 강해질 수 있을까…?
거울을 보니, 눈에 실핏줄이 터져 있었다.
모두가 이렇게 된다면 조금 무서울지도 …
“엄마, 엄마…” 나이 어린 학생이 하염없이 울고 있다.
저 아이의 부모님은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할까.
애타게 자식을 찾고 있을까.
이 광경을 보게 된다면, 같이 울음을 터트릴까 …
한 번 터진 코피가 한시간째 멈추지 않는다.
열병이 지나가기 전에 출혈과다로 죽는 거 아니야…?
머리는 어지럽고, 몸은 뜨겁고, 계속 흐르는 피를 닦아내는것조차 번거롭다.
"돌아가서 자서전을 쓰게 되면, 꼭 이번 챕터를 길게 쓸 거야."
누군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한다. 돌아간다.
…그건 얼마나 먼 미래의 일일까?
"지금쯤 잘렸으면 어떡하지…"
"역시, 여기서 돌아갈 때 금은보화를 싸 달라고 하자."
누군가 대답 대신 웃는다. 며칠만에 듣는 웃음소리.
“다행이야.. 내 딸이 여길 오지 않아서… 내가 대신 견딜 수 있어서..”
황궁의 시종에게 돌봐야 할 자식이 있다며 울부짖었던 어미다.
가라앉지 않는 고통때문에 3일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잠들려고 해도 뼈 마디 안쪽까지 갉작이는 아픔에 신음만 흘릴 뿐이다.
시종을 폭행하는 사건이 종종 일어나는지, 곳곳에 경비대가 배치되어 있다.
심한 사람은 침대에 묶여 구속된다는데.. 배변은 어떻게 하는 거지?
...시종이 들고 지나간 커다란 물그릇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드래곤도 같은 고통을 겪고 있을까?
어디선가 고통스러운 포식 동물의 울음 소리가 들려온다.
언제 끝나는 거야?
언제 끝낼 수 있어?
끝나기는 하는 거야?
쿵, 쿵, 소리가 나면서 벽이 울리나 싶더니 누군가 벽에 머리를 찧고 있다.
말릴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눈 앞의 풍경이 어느 영화관의 스크린 속에서 감상하듯이 느껴진다.
꽉 쥔 주먹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파인 손바닥은 제 손톱으로 긁은 흔적이다.
2.29
✺ 문득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하나, 둘, 열병을 털고 일어나는 자들이 보인다.
...그렇지 못 한 자도. 그들을 위한 진혼제를 한다는데... ...
열병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한 이들의 넋을 달래는 진혼제가 펼쳐지고 있다.
그들의 영혼이, 부디 이 낯선 세계에서 길을 잃지 않기를.
예일의 시민들이 ‘위대한 이의 죽음’ 을 기리고 있다.
위대한 이들. ...그들이 그렇게 불리길 원하기나 했을까?
진혼제는 전체적으로 엄숙한 분위기다.
그럼에도, 우리가 거리를 거닐 때 그들은 희망에 찬 얼굴을 한다.
마치, 신을 보는 듯이.
어딜 가나 흰 천이 나부끼고, 흰 꽃잎이 흩날린다.
그 백색에 파묻혀 있으면, 사라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시신을 태우는 장소 근처로 수없이 많은 향이 꽃힌다.
서서히 섞이는 향은 조화를 이루듯 무척이나 아름다워서,
황홀하다 느끼는 스스로를 낯설게 한다.
종종 예일의 시민들이 우리에게 선물을 준다.
꽃이며, 과일, 혹은 편지. ...묘한 기분이다.
열병을 막 이겨냈을 때, 시종들은 우리에게 ‘축하드린다’ 고 말했다.
… 그 말에 누군가 벌컥 화를 냈다. 이해하지 못할 반응은 아니다.
‘제단에 바칠 꽃이 필요하신가요?’ 흰 꽃이 가득 든 바구니를
어린 아이가 내민다. 따로 돈을 낼 필요는 없어 보인다.
예일의 식당 중 몇몇이 ‘소환자에게 무료 제공’ 이라는 광고를 붙였다.
‘드래곤에게 무료 제공’ 은 어째서 쓰여 있지 않을까 … ?
소환자라면, 여기서 다양한 음식으로 배를 채워도 괜찮을 것이다.
진혼제와는 별개로, 신전에서 죽은 이들의 명복을 비는 예배가 열린다.
관심이 있다면, 한번즈음 그 속에 묻혀 기도를 올려도 좋으리라.
「드래곤」
소환자들의 물건은 시신과 함께 모두 태워진다고 한다.
물건쯤은 보관해두어도 좋을 텐데. 아쉬운 일이다.
소환자의 재생 능력은, 아마도 창조의 영역이라 불리는
우리의 권능을 초월하는 힘으로 예상된다고 들었다.
...고작 인간 따위가?
여즉 소환자를 믿을 수 없다는 동족도 있다.
신체만 변화했으면 무엇하느냐,
제대로 검도 휘둘러보지 않은 그들을 믿고 심장을 바칠 수 있는가.
살아남은 소환자들은 과연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아직 그들이 천사를 없앨 수 있으리라고 확신할 순 없으리라.
그들의 몸이 준비되었으니, 이제 다음은 무엇을 해야 할까.
바로 실전에 들어가기엔, 아직 서툰 그들이 헛되이 희생될 것인데-
드래곤은 그 누구도 죽지 않았다. 당연스러운 일이다.
허나 그로 인해, 원망스러운 기색의 소환자들이 조금 생긴 듯 하다.
‘슬슬 레어에 들러 보고 싶은데’ 누군가 집이 그리운 듯 하다.
그러고 보니, 드라켄헤임의 공기를 슬슬 마시고 싶기도.
성장통도, 열병도 한 번이면 족하다.
다음엔 반드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긴 머리의 ‘신부’ 를 위시하여, 이계의 기도문을 읊는 이들이 보인다.
그들의 신은 아직 익숙지 않으나, 한번쯤은 함께 읊어도 좋으리라.
이제 우리는 소환자들과 더불어 천사와 싸우는 법을 익혀야 한다.
무엇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까. 한동안 연구가 필요하겠다.
여즉 소환자를 믿을 수 없다는 동족도 있다.
신체만 변화했으면 무엇하느냐,
제대로 검도 휘둘러보지 않은 그들을 믿고 심장을 바칠 수 있는가.
「소환자」
이전과는 전혀 다른 듯한 몸이다. 이게 기아스의 축복이라는 걸까.
손 끝을 쥐었다, 다시 편다. 다르지만, 여전히 내 것임엔 틀림이 없다.
망원경이라도 사용한 듯, 저 너머의 풍경이 눈에 훤히 보인다.
다른 사람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겠는걸 ...
누군가 넘어져 무릎이 까졌다. 그건 본래와 다르지 않은 걸까, 생각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상처가 놀랍도록 빠르게 회복됨을 볼 수 있었다.
텅 빈 옆 자리에 속절없이 시선이 가고야 만다.
이 자리의 주인은 불길 속에 재가 될 것이리라.
그 사람의 이름이, 무엇이었더라 ...
열병을 앓을 때 몸에 새겨졌던 상처는 씻은 듯이 사라져 있다.
몸만을 보면, 꼭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
조금의 의문이 생긴다. 이 재생력의 끝은 어딜까?
우리는 얼마만큼 다치고, 또 얼만큼 살아남게 될까?
열병을 앓고 나서 뒷목에 새겨진 검은 성흔이라는 것은
꼭 죄인에게 찍혀진 낙인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죽었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
그 사실이 묘한 부채감을 불러 일으킨다.
모두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던 걸까.
누군간 아직도 이 상황이 와닿지 않는 듯 하다.
본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면, 분명 아무도 믿어주지 않겠지.
솔루스에게 죽은 이들의 안식을 비는 기도문은 낯설기 그지 없다.
그러나, 오늘 하루쯤은 따라해 봐도 좋으리라.
✺ 예일 황성 근처의 가장 큰 광장.
장작과 꽃 위에 시신들이 깨끗하게 단정되어 가지런히 늘어서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이니, 그들의 방식대로 보내준다고 했던가요.
이 땅의 사람들은 모두 솔루스를 믿지만,
지금은 조용히 두 손을 모아 다른 곳에도 존재할 지 모르는 신에게 기도를 올리기 시작합니다.
로브를 입은 드래곤 셋이 걸어와 장작 앞에 섭니다.
아주 드물게, 특별한 황족에게 하는 장례법대로 드래곤의 권능으로 불을 붙이려는군요.
✺ ... ... 어디선가 노랫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 깊은 밤의 인도자 렌의 푸른 불꽃이 진혼제의 시작을 알립니다.
✺ 고요한 새벽의 인도자 리치의 손길 끝에서 나온 빛이,
장작과 꽃더미를 푸른 재로 만들어 나비처럼 나부낍니다.
✺ 찬란한 아침의 인도자 옐라시에의 불꽃이 그들을 감싸 안듯 타오릅니다.
✺ 제레미엘이 나직한 목소리로 기도문을 읊습니다.
그들에게 안식을.
부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