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위에 올려진 것."

 

2.21
✺ 내일은 황성 중앙의 거대한 홀에서 저녁 만찬이 열린다고 한다.
소환자만 400여명이 넘고, 드래곤은 50여명이 모일텐데. 모두 수용할 수 있을만큼 거대한 곳이다.
지금은 만찬 준비로 미리 테이블이 셋팅되고 있다. 시종들이 종일 분주하게 움직인다. 


「드래곤」


옐라시에와 마드론이 황성 공터에서 한바탕 벌이고 있다.
저 녀석들, 만나자마자 또냐....


슈르마가 또 구석에서 잠을 자고 있다.
아니, 평소에 눈을 뜨고 있는 건지 구분이 안 가 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닐 수도...
가 아니라, 역시 자는 게 맞잖아?!

 
황궁에 온 후로 가장 바쁘게 돌아다니며 인간을 탐구하는 드래곤 둘을 꼽자면,
단연 아테바인과 환일 것이다.
이런 상황이 퍽 흥미로울테지.



노아가 지나가는 사람마다 뒷통수를 치고 있다...
은근슬쩍 주변에 사람을 끌어들이는 건 변하지 않은 모양이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카스카다가 종이와 펜을 들고 무언가를 메모하고 있다.
무심한 인상으로 처음 보는 인간에게는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그이나,
직설적이고 통쾌한 화법을 듣고있자면 대화 상대로 좋은 인물이지.


 

「소환자」


"텔! 레! 포! (처억..)"
어느 새 알 수 없는 주문과 요상한 포즈가 유행처럼 돌고 있다.
저렇게 하면 집에 갈 수 있나..? 나도 해볼까?
...갈 수 있으면 진작 갈 수 있었겠지..

 

어디서 로또 당첨자의 기운을 받아볼 수 있댔는데..
벌써 끝났으려나?
그러면 로또는 어떻게 된 걸까?

 
황궁 구석, 볕이 잘 드는 곳에서 신부님으로 보이는 사람이 기도하고 있다.
이름이... 제레미엘이랬던가?
여기에서도 우리 세계의 신에게 기도가 닿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공구함을 메고 있는 청년이 멀거니 서 있다.
사색에 잠긴 걸까... ...
그게 아니면..?


귀엽고 작은 드래곤을 보았었는데.. 저 멀리 굉장히 닮은 어른 드래곤이 보인다.
형제? 아니면 부모?....아아아아!
작아지고 있잖아!!

 


 


2.22
✺ 오늘은 황성 중앙의 거대한 홀에서 저녁 만찬이 있다고 한다.
홀은 꽃으로 치장되어 있고, 조금 일찍부터 간단한 과일이 준비 되어있다.
벌써부터 하나,둘 몇몇 사람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차를 마시고 있다.

✺ 어느 새 갖가지 음식들이 나오고 저녁 만찬이 시작되었다.
넓은 홀은 사람으로 가득 찼고, 종족이 다른 서로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드래곤」


느즈막히 도착한 동족이 느긋한 걸음으로 들어온다.
오늘 황성 홀에서 있을 저녁 만찬을 알려줘야겠지.


황성의 중앙홀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이런 치장은 일 년에 한 번,《솔루스가 머무는 날》에나 볼 수 있을진데.
홀의 한 켠에서는 우리의 신을 위한 음악이 잔잔하게 연주되고 있다.



「소환자」


느즈막히 소환된 소환자들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역시 꿈이라고 생각하는 게 전형적인 패턴이긴 하구나..

 
황성의 중앙홀은 꽃과 은은한 조명으로 잔뜩 치장되어 있다.
며칠을 여기에 머물렀지만, 이런 광경을 보니 새삼스럽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뿐이다...

 



✺ 갈라테이아 황제가 입장했다. 

 

✺ ... ... ...



「드래곤」

정말로 이세계의 기사와 계약을 하게 되고, 그들에게 심장을 내어준다면.
드래곤의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는 없는 상태가 되겠지.

 
오래 산다고 해서 고통에 무뎌지지는 않는다.
어릴 적에나 겪었던 「용의 성장통」과 비슷할 것 같다는데.
… ...다시 느끼고 싶은 고통은 아니다.

 
「성장통」과 비슷한 고통이라니… ..
동맹에 동의했고, 어떠한 대가가 있을 걸 감수하고 황궁에 왔지만.. 끔찍한 현실이다.


“뭐, 성장통?!”
기겁을 하는 동족이 보인다.
무리도 아니지. 차라리 태초의 오물에 뛰어드는 게 더 나은 고통인것을.


아주 드물지만 성장통으로 「실성한 용」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부디 돌아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동족이 없길.


초대의 예언은 용이 기사의 검이 된다는 것. 
승패는 알 수 없다... 그럼, 결과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일 테지.


“샘의 물은 본체로 마셔야 하는가?” 누군가 중얼댄다.
본체라면, 샘 하나쯤은 금세 동나지 않을까 싶은데.


“인간의 만찬은 참으로 오랜만이었지. 더 먹고 싶군.” 동족 하나가 느긋히 만찬을 회상한다.
퍽 여유로워 보이는군.


소환자 하나가 결연한 얼굴로 일어선다. 
저 자가 선택하려는 것은 자신의 운명과 사명에 대한 순응일까, 혹은 반항일까.


“마음에 드는 인간이 있다면 좋을 텐데.” 동족 하나가 중얼거린다.
마음에 든다는 건 무슨 조건일까?
강한 것? 희생적인 것? 아니면-...


인간에게 힘을 주었을 때, 우리는 처음으로 「불완전한 존재」가 된다.
그건 어떤 기분일까. 알고 싶기도, 알고 싶지 않기도 하다.

 
“정말 저들이 해낼 수 있겠나.”
누군가 낮게 읊조린다... 「완전한 존재」인 우리조차 하지 못한 것을,
이 세계의 인간도 아니었던 이들이, 정말 할 수 있는가. 

 
새로운 맹약이 늘었다.
이 숨이 다할 때까지,
세계의 존엄을 위하여.


시종들이 우리가 열병을 나는 동안 필요한 것을 준비 중이다.
내가 원하는 것도 일러 두어야겠군.


느릿히 흘러나오는 성수는 퍽 찬란히도 빛난다.
꼭, 우리의 신과 같이.

 
소환자들의 안색이 좋지 않다.
필멸자에게는 벅찬 일인가.





「소환자」


여기가 어딘지, 이건 꿈인지, 붕 떠있던 분위기는 ‘만찬’이후 완전히 깨졌다.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이다.
애초에 선택지라는 게 있는 ‘부탁’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성장통?!”
기겁을 하는 뿔 달린 사람이 보인다.
성장통이 뭐 어쨌단 말이야, 이 쪽은 목숨이 걸렸단 말이야!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집에 돌아가게 해달란 말야…!”
한 쪽에서 황궁 관리인과 실랑이하는 「소환자」가 보인다.

 
한층 예민해진 공기에, 여기 저기에서 다툼이 벌어졌다.
싸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닐텐데..

 
정말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걸까?
갑작스럽게 세상을 구해달라니, 말이 돼?

 
세계를 구하기 전까진 돌아갈 수 없다.
돌아갈 수 없다.
돌아갈 수 없다... ...


어째서인지 황제가 말했던 「등불을 든 죄 지은 자」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고있다.

 
“이런 걸 시킬 거라면, 적어도 애들은 데려오지 말았어야지!”
중년의 누군가 화를 내고 있다.

 
“기사라는 거..무보수 노동은 아니겠죠?”
”그럼 신고해야지..”
“황정인데…? 황제를? 어디에..?”
현실적인 듯 현실적이지 않은 대화가 기둥 뒷편에서 들려온다...

 
“저기요, 여기서 죽으면 묘비는 만들어 주나요?
제사는요? 전 치킨 좋아하는데.”
누군가 천연덕스럽게 시종을 붙잡고 물어보고 있다. 성격 참...

 
“마신다, 마시지 않는다, 마신다, 마시지 않는다..”
누군가 꽃잎점을 보고 있다.
정신이 나간 건 아니겠지?


저 물을 마시고, ‘이 세계에 맞춘 몸’ 을 얻은 나는,
지금까지와 같은 ‘내’가 맞는가?
철학놀음에 답해줄 이는 보이지 않는다.

 

 

 

✺ 선택받은 아이들과 드래곤의 모험이 시작된다....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헬리오스의 하루 

 

 

 

 2.24
 ✺ 밤이 지나가도 또 다시 아침은 왔고 시간은 흘러간다.

 

아직 열병이 돌기 전.
성수를 마신 사람들은 묘하게 덤덤한 얼굴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암묵적으로 만찬때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있다.


기아스의 열병은 내일부터 돌기 시작한다고 했다.
열병이라니.. 몸살이나 감기처럼 아픈 수준이면 좋으려만.


열병은 짧게는 4일, 길게는 일주일은 앓을 수 있다고 하던데...
지금 잠깐의 휴식이 겉잡을 새도 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만 같다.


성수는 평범하고 약간 비릿한 물 맛이었다.
본래는 아침마다 솔루스의 신전에 바치는 단순 의례상의 그것이었을텐데.
정말 고작 그거로 큰 변화가 일어날까.


끝까지 성수를 마시지 않은 소환자 무리가 보인다.
그들끼리 모여 기도문을 외우는 듯 하다.


황궁에 펼쳐져있던 결계가 사라졌다는데...
쾌적한 온도로 느껴졌던 이 곳에 서늘한 바람이 들어온다.
아차, 아직 2월. 겨울이 채 지나지 않은 때이다.


드래곤과 소환자의 숙소 사이에 있는 넓은 공터에 장작불이 타고 있다.
담요를 두른 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나눈다.
작은 웃음 소리가 들렸다.


공터 주변에는 앉을 의자가 놓여있다.
약속이라도 하듯 어느 새 모여드는 인적에 시종들이 담요와 따듯한 스프를 나눠준다.


지난 이틀이 거짓말처럼 느껴질만큼 묘하게 안정적인 분위기이다.
오히려 그 안정감에 위화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장작불 근처에는 누가 시작했는지 모를 꼬챙이들이 끼워져있다.
소세지, 고구마, 말린 육포까지.
시종들이 한 켠에 간단한 술을 준비해두었다.


내일이 되면, 무엇이 바뀔까.
...지금은 생각하지 말자.
고민해도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


그 며칠 사이 벌써 친분을 쌓았는지,
각자의 종족이 다름에도 서로를 친근하게 대하는 무리가 보인다.
이 세계의 주민은 드래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진데,
소환자는 적응이 빨라 보인다.


숙소에만 틀어박힌 이들도 많지만,
하나 둘 밖으로 나와 넓은 공터 곳곳에 자리잡는다.


공터의 곳곳에 장작불이 타오르고 있다.
아직 채 가시지 않은 겨울 바람이 불어도,
담요를 두르고 그 앞에 자리하자면 포근함이 느껴진다.


어디선가 웃음기 어린 담소가 들려와 돌아보니,
넓은 공터의 곳곳에 놓인 장작불에 듬성듬성 인적이 모여 있다.
내가 아는 얼굴도 있을까?


솨아아, 바람이 불자 나뭇잎 스치우는 소리가 꿈결같다.
어쩐지 현실감이 떨어지고 붕 뜨는 기분이 든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더라..


“갈라테이아 님께서…”, “아무도…”,
작게 말하던 시종이 이 쪽의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문다.
함구령이라도 있었는지.
잘난 황제는 만찬 이후로 얼굴을 비추지 않고 있다.


시종이 조용히 드래곤 사이를 다니며 소곤거린다.
“혹시, 회복 관련된 권능이 있으신 분이 계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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